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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산호세푸른초장교회 2024. 5. 19. 04:43

<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

1:6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첫 번째 14대를 마무리하면서 두 번째 14대를 시작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14대는, 마 1:6에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어머니는 밧세바입니다(삼하 12:24). 그런데 왜 ‘다윗은 밧세바에게서’라고 하지 않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밧세바보다는 우리야의 충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부르고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사악한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우리야라는 충성된 군인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간 우리야는 어떠한 충성을 했습니까? 첫 번째,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충성입니다. 삼하 11:8에서 “저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식물이 뒤따라 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부른 다윗은 그에게 특별 휴가와 함께 왕이 식물 곧 오늘날로 말하면 포상금까지 주었습니다. 목적은 우리야를 집으로 보내서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동료들과 부하들을 생각하여 그날 밤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잠을 잤습니다(삼하 11:9). 행 24:16에서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야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하지 않는 충성된 군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지조 있는 충성입니다. 왕의 특별한 은혜를 거부하고 집으로 가지 않은 우리야를 다윗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다윗이 물었습니다(삼하 11:10). 그러자 우리야가 대답합니다. 삼하 11:11 표준새번역에서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두 장막을 치고 지내며, 저의 상관이신 요압 장군과 임금님의 모든 신하가 벌판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만 홀로 집으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고, 나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임금님이 확실히 살아 계심과, 또 임금님의 생명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런 일은 제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야는 어떠한 상황 또 누구 앞에서도 신앙의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않는 지조 있는 충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유혹까지도 물리친 충성입니다. 우리야의 단호한 모습에 당황한 다윗은, 다음 날 우리야를 다시 부릅니다. 그리고 삼하 11:13 상반절에서 “다윗이 저를 불러서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야를 흠뻑 취하게 해서 그의 성적 충동을 유발시켜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삼하 11:13 하반절에서 “..저녁때에 저가 나가서 그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야는 그날 밤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그를 술로 유혹하였지만, 우리야는 피하기 힘든 마지막 그 유혹까지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나라를 향한 충성심으로 이겼던 것입니다. 딤후 2:4에서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과 같이, 실로 우리야는 자신을 불러 주신 하나님께 언제나 기쁨을 드리는 충성된 군사였습니다.

 

2. 다윗의 범죄를 강조한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는 이 표현은, 하나님이 다윗의 범죄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 하면 다윗이었는데, 그 다윗이 왜 범죄자가 되었을까요? 첫 번째, 영적으로 나태해졌기 때문입니다. 삼하 11:1에서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전쟁이 일어나서 국가적으로 비상 상태이지만 다윗은 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삼하 11:2 상반절에서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저녁 때까지 잠을 잘 정도로 그는 영적 나태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안목을 정욕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삼하 11:2에서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다윗은 저녁 때에 일어나서 지붕 위를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보는 순간 그 자리를 떠났어야 하는데, 다윗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바라보다가 결국 그는 범죄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요일 2:16에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성도는 반드시 안목의 정욕을 이겨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삼하 11:3에서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다윗은 신하에게 목욕하는 여인의 신상을 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자신의 충성스러운 용사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삼하 23:39). 그러므로 신하가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라고 말했을 때, 다윗은 당장 죄악된 생각을 멈춰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서 마음이 미혹된 다윗은 올바른 판단력을 할 수 없었습니다. 벧전 5:8 공동번역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 다닙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다윗도 사단에게 넘어가 범죄하였다면 우리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날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강조한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시 6:6에서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책망을 받고 침상을 띄울 정도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통분히 여기며 회개하는 다윗을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고, 나중에 낳은 아들 솔로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축복의 통로를 열어 주셨습니다. 실로, 롬 5:20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시 27:10에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육신의 부모는 나를 버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언제나 받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께 우리야처럼 충성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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