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을 부르시며
창 3:8-9
하나님이 인류에게 최초로 한 질문은 ‘네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처한 신앙의 현주소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창 3:9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어디 있느냐’는 어떤 부르심일까요?
첫째, 자기 자리(위치)를 떠난 자에 대한 부르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있어야 할 자리는 선악과 아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 2:17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엄히 말씀하셨기에, 그들이 그곳에서 뱀과 대화 나눌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창 2:15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셨듯이, 아담과 하와가 있어야 할 곳은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는 사명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했습니다. 이 이탈로부터 인류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창 3:5에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는 뱀의 말을 그들이 마음에 받아들이자 이전에 없던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창 3:6에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그들에게 잘못된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결국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그들의 가정에 말할 수 없는 환난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인생의 비극은 하나님을 떠난 데서 온 것입니다. 눅 2:49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고백처럼, 성도가 머물러야 할 마땅한 자리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아버지께 기도드리고, 아버지를 향하여 찬송하며,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부르심을 통해 현재 우리 각자의 신앙의 현주소를 묻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자에 대한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 곧 말씀을 피하는 자에 대한 부르심입니다. 창 3:8에서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을 피하고 숨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지으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창 3:10에서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아담이 고백하였듯이, 죄는 하나님의 소리 곧 말씀을 두려움으로 변질시킵니다. 그 결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만듭니다. 렘 23:24에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시듯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결코 숨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였을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요일 1:9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듯이,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불의에서 건져내어 우리를 다시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문제의 답을 주시기 위한 부르심입니다. 즉, 우리에게 다시금 소망을 주시기 위한 부르심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목적이 멸망시키시는 것이었다면 아담을 그토록 부르셨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죄를 짓고 숨어 있는 아담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면 그는 자연스럽게 멸망의 길을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그대로 두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메시아에 대한 약속 곧 여자의 후손에 대한 언약을 주시고(창 3:15), 그 확증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창 3:21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최초의 질문인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부르심은, 죄지은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심판의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죽옷이라는 증표를 통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답을 주시는 소망의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계 3:20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처럼,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과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말씀으로 마음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하나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6년 3월 22일 주일 조인호목사 설교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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