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서 계신 곳
눅 6:12-19
이 세상은 문제가 충만한 세상입니다. 개인, 가정, 직장, 사업, 나라 등을 볼 때 문제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대를 가리켜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마 17:17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서 계신 곳으로 나아간 겁니까? 나아가지 않은 겁니까? 나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서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믿음이 있고 순종적인 세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산에서 평지로 내려오셨습니다.
본문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두 군데의 장소에서 두 가지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산과 평지입니다. 눅 6:12-13에서 “(12)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먼저 산에서는 예수님이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도하시는 가운데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눅 6:17에서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평지로 내려오셨습니다. 평지는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둘투둘한 것도 없고 막힌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찾아 올 수 있는 곳이 평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산에서 평지로 내려오셨습니다.
2. 평지에 서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 받으려면, 평지에 서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을 볼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서 계신 평지로 나아왔습니다. 그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이고, 둘째, 삶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께로 나아갔던 것입니다(눅 6:17-18). 그런데 그들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눅 6:17 하반절에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계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만 해도 약 150km의 거리입니다. 그 당시 차가 있습니까? 길이나 좋습니까? 그리고 삶의 문제를 해결 받기위해서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은 영육간에 병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 아픈 몸을 끌고 그들은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함을 보시고 산에서평지로 내려오셨습니다. 잠 8:17에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누구든지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만나주시고 그가 가지고 있는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3. 예수님을 만지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지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 이유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눅 6:19에서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특별히 그들은 병을 고치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2년 동안 병원을 의지하고 의사를 의지했던 한 여인도, 병을 고치는 능력이 병원과 의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습니다(마 9:20-21).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 9:22에서“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만지는 즉시병에서 해방 받았습니다.
결론> 예수님을 만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천년 전, 평지에 서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예수님을 만진 사람들은 모두 다 가지고 있던 삶의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가 없는데 예수님을 만진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 1:1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을 말씀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요 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2천년 전 이 땅에 초림하신 예수님도 말씀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계 19:13에서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다시 오시는 재림하시는 주님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마음에 모시고 말씀을 붙잡고 사는 것은, 하나님을 만지는 것이고 예수님을 만지는 것이 됩니다.
히 13:8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2천년 전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도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평지에 서 계시다는 것을 믿으시고 예수님께로 나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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